'사람들의 좋은 인품과 덕성을 기르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하는 서예·문인화가 현덕 유명헌 선생.

#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모란역 7번 출구 앞에 오라타워라는 11층짜리 건물이 있어요. 건물 뒤로 돌아가시면 주차장이 있을거예요. 그곳에 주차하시고 4층으로 올라오시면 돼요.”

그는 얼마 전 그 건물의 4층을 사들여 작업실을 만들었다. 좀 낡긴 했지만 그래도 접근성이 뛰어나 이내 찾을 수 있었던 건물로 들어가 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환한 작업실 유리창 안에서 그가 웃으며 달려 나온다. 진한 묵향을 기대했는데 묵향보다는 뼈를 태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수우각(水牛角) 냄새예요. 물소뼈로 낙관을 파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시커먼 물소뼈를 장난스럽게 코앞에 들이댄다. “그러네…. 뼈를 깍는 냄새네…. 흐훗”. 서예 관련 책자들과 온갖 붓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작은 작업실의 앞에는 또 다른 방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아시지요?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선생도 학생도 발전한다'. 그래서 예전엔 제게 배웠지만 지금은 남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들께 공간을 내어줬어요. 물론 저도 글씨를 쓸 때는 이 공간을 이용하구요. 오늘도 수업이 있어 조금 있으면 선생님들과 수강생들이 올거예요.”

그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초서에 능통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형들과 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구들이 글씨를 잘 쓴단다. “아버지께 배운 이후론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다녔어요. 필세(筆勢)만 보면 알 수 있었거든요. 이 분이 고순지 하순지. 그래서 한 선생 밑에서 어느 정도 배우면 또 다른 선생들을 찾아다녔어요. 나중엔 글씨만 써선 안 되겠다 싶어 경희서문(慶熙書文)에 들어가 제대로 이론 공부도 했어요. 그래서 논문이랍시고 쓴 게 인터넷에 떠도는거예요.” 얼마전 책테마파크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엘 갔을 때, “인터넷에 유선생님 ‘문인화(文人畵)의 이해(理解)’라는 논문이 있던데…. 그거 엄청 어렵습디다.” 하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 다 베껴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헤헤.” 문인화를 이해하는데, 또는 서예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논문을 읽어본 이들이 후기를 달은 그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는 예의 쑥스럽거나 부끄럽고 어색할 때 나오는 실없는 농으로 받아 넘겼다. 그런 그를 보며,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유선생이지…. 허허” 함께 웃어 넘겼다.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핀다.

그는 1960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워온 그는, 일찍이 각종 공모전과 대한민국 미술대전 등에서 많은 상을 수상한바 있고, 모란 현대미술 초대작가, 한국미술협회 회원, 전국 서예대전 휘호대회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경희대학교 평생교육원 사군자·캘리그라피 외래교수 등으로, 분주한 일상을 살아왔다. 그 사이 예술의 전당 등에서 개인전을 비롯한 많은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지금은 서예나 문인화,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에 최소한 두서너 군데의 강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는 강의가 없는 공휴일에는 작업실과 집이 있는 성남의 각종 행사장에 가장 먼저 나타나 그가 배출한 서예·캘리그라피 전문강사들과 무료로 가훈도 써주고, 명구도 써주며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진난만함과 무욕으로 살아온 서예인, 그는 우리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절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의 친절한 마음은 내어줌의 행복을, 보답을 요청하지 않고 오로지 내어주는 데서 오는 기쁨만을 생각하는 듯 늘 밝고 즐겁기만 하다. 그래선지 가끔씩 그를 만나면 항상 반가운 마음 한편에 욕심 많은 나의 삶이 넌지시 드러나 부끄럽기만 하다.

“돈 중요하지요. 하지만 너무 돈을 쫓으면 안되는 것 같아요. 물론 쉽지는 않지만…. 하지만 마음을 조금 편히 가지면 나를 잃지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마음을 조금 여유롭게 가지니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사소한 행복과 웃음 속에 사람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늘 즐거워요.” 욕심을 내면 더 많은 강의를 할 수 있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줄이고 작업실을 열었다고 한다. “요즘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많이 강의하는데, 많은 서예인들이 캘리그라피는 서예의 실용성을 보완한 것일 뿐, 예술과 정신이 깃든 서예 본연의 미학에는 미치지 못한다고들 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이미 불가분 관계로서 맥을 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좀 더 전문적인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서예가 기본이 되어야하죠. 그러니 오래 동안 글씨를 연마한 서예인들이 나서야하는 거지요.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무조건 저급한거라고 무시하는 태도는 예술가로서의 기본적인 덕망조차 갖추지 않은 것 같아 저는 몹시 불쾌해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평소 장난기 가득하고 천진한 그도 서예와 캘리그라피 이야기를 할 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말처럼 결국 캘리그라피는 서예의 범주에서 벗어나서는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장르를 서예의 범주에 안치시키려는 것 역시 무리수가 따르는 일이다. “대중들의 눈높이는 이미 첨단을 달리고 있어요. 쓸 때 마다 다른 유일한 글씨, 사람이 직접 쓰는 캘리그라피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반대중의 눈높이가 서예를 갈망하고 있지만, 한국서예의 전문가 집단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21세기 현실 속에 진입하지 못한 듯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용감한 서예인들도 적지 않은데 그저 그들이 현실 속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마치 파계라도 한 것처럼 쉽게 주홍글씨를 새기려하기 때문에 무거운 갓과 도포를 벗기가 두려워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한국서단은 세대의 전환, 교육방법과 사승관계, 서예의 진로에 대한 전환과 혁신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대목이지요. 이제 제겐 작품 서예가 곧 캘리그라피입니다.”

#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

늦은 밤, 그의 작업실에서 나와 모란역 앞에 이르니 어느 은행의 와이드칼라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의 희망이 또 다른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들이 모여 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갑니다.’ 현덕 유명헌 선생, 글씨와 그림으로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바로 그의 이야기 같았다.

그는 수많은 서예와 캘리그라피 전문강사들을 배출해 냈고,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열정과 실천력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자유로운 창작의 작품 세계를 구현해 내고 있다. 서예가라고 불리던, 캘리그라퍼라고 불리던, 그는 오늘도 어디선가 장봉을 휘두르며 고단한 일상에 위로를 써내려가면 그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과 글씨를 보며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는 것은, 그것이 욕심 없는 그가 꾸는 그의 유일한 꿈이고, 오랫동안 공부해온 '예술의 궁극(窮極)'이라 그가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길 기대해 본다. 

지난 9일부터 시작된 현덕 유명헌의 <한글날 기념 전시회>가 오는 10월 30일(일)까지 분당 율동공원 책테마파크 내 북카페 전시실에는 이어지고 있다.

현덕 유명헌 선생의 작품 '화려한 목단꽃 나를 보고 웃는구나.

김세중 논설위원  sjkim@newsinside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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